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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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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서울북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북부)우리지역 현충시설물 바로 알기
부서 보훈계
============== 우당기념관 ============== 서울북부보훈지청(지청장 정종기)에서는 우리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물을 내고장 주민들에게 알림으로써 생활주변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자나라는 청소년의 호국·안보의식 고취 및 지역민의 애국심 함양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우당기념관(우당기념관)(종로구 신교동 6-22)은 당초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에 위치했던 것을 2001. 6. 1. 신축 이전하여 우당선생의 유품 등을 전시 관리하고 있다. 주택가에 위치한 기념관은 6개 코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회영선생의 일생, 6형제의 독립운동, 신흥무관학교, 함께 독립운동을 하신 독립유공자 등 관련 자료 및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은 서울 저동(苧洞)사람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일가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회영선생은 형제의 서열상 넷째가 되며, 첫째가 건영, 둘째가 석영, 셋째가 철영, 훗날 해방직후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취임한 성재 이시영 선생이 다섯째, 그리고 여섯째가 호영이다. 1909년 봄 양기탁집에서 신민회 간부인 그와 안태국·이승훈·김구 등이 함께 모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고 현지답사를 하여 독립기지 건설의 적지로 만주의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지방을 선정·개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형제들과 일가권속을 모두 이끌고 1910년 봄 이 황무지로 망명하였다. 1910년 봄 추가장(鄒家莊)에 정착한 그는 1912년에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1913년 다시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광무황제를 해외로 망명시키고자 하였으나 광무황제가 붕어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1919년 2월 북경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민족주의로부터 점차 무정부주의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4월에는 유자명·이을규·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정의공보를 간행하였다. 1931년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과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32년에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마련함과 아울러 주만일군사령관 암살등을 목적으로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노령인데다가 일경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끝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우당기념관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적선동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효자동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 보도를 건너 약 250M 올라가면 찾을수 있다.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는 우당기념사업회에서는 우당선생 관련 각종 추모행사를 추진하고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고 교육입국론을 펼치신 선생의 뜻을 받들어 우당장학회를 설립하여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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