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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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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12월의 독립운동가-이명하 선생
부서 보훈과
「12월의 독립운동가」공적개요 몽학(夢鶴) 이 명 하(李命夏) 선생 (1878. 1. 23 ~ 1921. 3. 3)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명하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기도 광주에서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정통 사대부가에서 태어났다. 개항 이후 외세의 문물이 밀물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 위정척사론을 견지하던 유인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면서 전통적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어 상경하여 근대 교육기관으로 변신 중이던 성균관에서 한학과 신식학문을 수학하여 신구학문을 겸비하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습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관직에 나아가 제천군 주사로 봉직하며 국민 계몽을 위해 근대학교를 세워 교육계몽운동을 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훼손되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박차고 나왔다. 쓰러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고,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운동에 투신한 것이다. 유인석의 문하로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소모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들을 숙청하여 민족의기를 드높였다. 나아가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1907년 말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전을 전개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후 이강년 의병장의 지시로 각지로 다니며 의병운동의 발흥을 촉구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경술국치를 당하여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국가가 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진룡 의병장과 함께 무장투쟁을 지속하여 갔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일대의 의병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이 합류하여 대한독립단을 창단하고, 무장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하였다. 대한독립단 무장대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나아가 국내에서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조직인 보합단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들을 숙청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일제의 소위 ‘경신대토벌’ 작전으로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변경지역은 물론 서간도·북간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이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압록강 대안의 교통의 요충인 중국 안동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여기서 동지들과 군수품 등을 마련하여 재차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영사관 경찰들과 격전을 벌여 일경들을 처단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본영사관과 평북경찰부 소속 경찰대의 추격을 받았고, 1921년 3월 3일 일본경찰대의 습격으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결국 이 전투에서 선생을 비롯한 15인의 독립군 용사들이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2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선생에 대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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