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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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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셋째주 탐방 - 의병대장금포노병대선생기념비
부서 지도과
노병대선생기념비(盧炳大先生記念碑) □ 소재지 : 경북 상주시 남성동 19(상주교육연구원 앞) □ 건립기관 : 노병대선생기념사업회 □ 건립일자 : 1969. 10 .10 □ 시설규모 : 높이 2.2m □ 관리기관 : 유족대표 노진영 □ 내용 노병대 선생(1856 - 1913)은 1856년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북쪽 하늘을 향해 통곡하였으며, 이듬해인 1906년 서울로 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 청계사에 본부를 두고 동지들을 모았다. 김운로, 송창헌, 임용헌 세 사람은 전부터 의병활동을 해 오던 사람으로 적극 가담하여 거사 준비를 진행했다. 의병모집에 필요한 자금은 모두 선생의 가산을 처분해서 마련하였다. 1907년 8월 1l일 군대 해산 후 많은 군인들이 속리산으로 들어와 선생의 의병진에 가담했다. 노병대 부대가 제일 먼저 공격한 것은 보은의 분파소다. 이어 10월 7일 미원에서 싸워 적병 5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미원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오래 머물지는 못하였다. 군대를 나누어 호남을 거쳐 성주에 이르러 적 십여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1908년 봄에는 거창에서 크게 싸워 적병 10명을 사살하였으나, 우두령을 넘어 김천으로 가려다가 매복했던 적군의 공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어 속리산 본거지에 도착해 보니 남은 군사는 52명뿐이었다. 의진을 재건하기 위해 애쓰던 중 1908년 7월 13일 보은에서 일본 헌병에게 잡혀 공주에서 재판소로 송치되었으나 일제에 굴하지 않았으며, 적은 선생의 한쪽 눈을 제거하였다. 단식하여 자진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 경축 특사의 미명으로 풀려나왔으나 "너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며 버티다가 강제로 출옥당하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 투쟁을 하다가 1913년 봄에 독립군자금 조달활동 중 강도의 죄명으로 다시 구속되어 대구재판소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옥중에서 단식하여 단식 28일만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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