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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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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우리지역의 독립운동가 소개 - 이기송 선생
부서 보훈과
◎ 이기송 선생(1888.11.7~1939.6. 20)
  - 1919. 3.23  임실 오수 독립만세운동 주동
  - 1919.10.30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음
  - 1963. 8.15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전라북도 임실(任實)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미 오수리에서는 3월 10일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임실군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본인 교장이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형에게 당부하여 학생에 의한 만세운동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오병용(吳秉鎔)·이만의(李萬儀)를 비롯하여 천도교(天道敎)·예수교인들과 연락하여 장날인 3월 23일 오후 2시를 기하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한 일장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따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시위군중이 점점 불어나 800여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경찰주재소에서 순사를 파견하여 그를 강제 연행해 갔다.
  이에 격분한 80여명의 만세시위군중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당황한 일본인 순사 촌정(村井)이 그들의 위세에 눌려 석방하였다. 다시 그를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군중이 시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전개할 때에 그 수가 2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운동이 격렬해졌다.
  만세시위의 대열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 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대가 주재소로 쇄도하자 일본 순사들은 달아나 버리고, 순사보 고택기(高宅基)만이 총을 겨누고 위협하니, 군중은 총을 빼앗고 만세대열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여 만세를 부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날 저녁에 남원(南原)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무장한 병력이 대거 출동하여 시위 대열과 대치하다가 무자비한 발포로 일단 해산되었으나, 시위군중은 3, 4백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튿날부터 일제는 검속을 단행하여 결국 그는 체포되었으며 1919년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7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고등법원에서 상고하여 독립만세의 정당성을 강력히 역설하였으나, 기각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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