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동부보훈지청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전북동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전주) 김인애 지사가 밝힌 전주독립만세운동
부서 보훈과

1919년 3월 13일 전주 남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인애(최귀물.당시 기전학교 학생) 지사가 이른바 의식화에 눈을 뜨게된 배경은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큰 오빠 김인전.김가전 목사 등의 기독교적 가풍의 영향이 컸다.
충청도에서 전주로 이사온 김인애씨의 큰 오빠 김인전 목사(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역임)는 전주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체포된후 석방됐다. 이러한 가풍속에서 김인애 지사는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기전학교 시절 어린나이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된것.
친구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김인애 지사는 가장 먼저 큰 오빠 등 가족들의 신변보호에 나섰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최귀물로 바꾼 것이다.
전주 3.1운동 최고 지도자인 김인전 목사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오빠들에게 누가 될까봐 성은 외가 성을 따고 이름은 아명인 귀물을 사용한 것이다. 말 못할 고난을 당할 것으로 알고 감쪽같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같이 일본 경찰들도 김인애의 변신술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손자 김상수씨는 "가족들이 형무소에 할머니 면회를 갔는데 인애라는 이름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6개월여의 투옥생활을 마친 그는 기전학교를 졸업한뒤 일본 히로시마나가야마여학교,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한뒤 전주 기전여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남편 김종곤씨 역시 3.13 전주 만세운동에 가세한뒤 상해 등에서 망명생활을 한후 25년께 입국해 김인해 지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김 지사가 1957년 기록한 "기미 거사"는 거사 준비단계에서부터 투옥생활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가 이처럼 기미 거사를 기록하게 된 배경은 더 기운이 약해지기 전에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싶어서였다고 전해진다.

  ▲ 당시의 재판기록.  
김 지사는 기록에서 "12일밤 가정을 떠나는 광경이야 일우 말할 수 없다.(중략) 두 겨드랑이에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뭉치씩 껴안고 몸으로 감추기 위하야 쓰게치마를 쓰고 인적이 고요한 밤 달 밝은 밤에 왜놈에게 발각이나 아니될까 무서워서 떨며 남문아래 모 동지 집으로..."라며 독립만세운동 전야를 소상히 설명했다.
또 "남문 인경이 울리는 때를 단단히 하고 섯다가 뛰여 나가서 장터로 일제히 나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라면서 만세운동 당시를 생생히 기록했다.
"수만 군중은 태극기를 집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실컷 불렀던 것이다. 우리는 경찰서 앞흐로 들어가니 수만 군중이 따르난대 그 때 기쁨이야 엇지 다 기록하리오. 왜인들은 천만 뜻밖에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나오나(중략) 체로를 하기에 당황하다 붉은 잉크를 들고 나와 막 뿌려서 표를 하야 잡앗다. 우리 연약한 녀학생들 머리채를 잡아 막 흔들고 때리고 끌녀 구둣발로 차고 박아직소하며 막 치니 쓰러지고 너머지며 빰을 쳐도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김 지사는 투옥생활 중의 이야기도 놓치지 않았다. "밤중에 왜놈 간수가 와서 마당에다 내어 낫코 차고 때리고 벌을 쓴 일도 있다. 사흘만에 혹은 일주일 만에 재판소에 가서 문초를 밧고 또 다시 도라온다. 부모님들은 행여나 죽이지나 아니 하였는가 피뭇은 옷이나 아니 나오는지 하고 날마다 형무소 밧게서 세월을 웃고 불고 지내섯다"고 형무소 생활을 설명했다.
이와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법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갈때 "용수"를 쓰고 다녔는데 여자들 13명이 한 떼를 이뤄 가면은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여자"들이 무슨 죄를 저질러 저렇게 재판을 받고 다는지 수군될 때마다 가장 부끄러웠다"고 김 지사는 기술했다.
김인애 지사와 남편(김종곤)의 독립운동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후손들의 소극적인 의지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의 유지가 큰 이유였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느냐"면서 "한사코 만류했기 때문이었다"고 손자 김상수씨는 말했다. 실제 김종곤씨의 아호가 시은(市隱)이라고 했다. 이는 조용하게 산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고 김인해 지사는 1970년 82세의 일기로 숨졌고 남편 김씨는 1977년에 숨졌다.
                                                                           - 2월 28일자 새전북신문 기사 게재-

파일
URL